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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스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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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로이스 히틀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로, 1837년 오스트리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구두 수선공으로 시작해 공무원이 되었으며, 1876년 성을 쉬클그루버에서 히틀러로 변경했다. 알로이스는 세 번 결혼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셋째 부인 클라라 히틀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지만, 아돌프는 화가가 되기를 희망하며 갈등을 겪었다. 알로이스는 1903년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상과 생부 논란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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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스 히틀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알로이스 시클그루버
출생1837년 6월 7일
출생지오스트리아 제국 니더외스터라이히주 발트피어텔 슈트로네스
사망1903년 1월 3일
사망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버외스터라이히주 린츠 레온딩 가스타우스 비징거
안장지레온딩 시립 묘지
직업세관 공무원
국적오스트리아
가족
배우자안나 글라슬-회러 (1873년 결혼, 1883년 4월 6일 사망)
프란치스카 마첼스베르거 (1883년 5월 28일 결혼, 1884년 8월 10일 사망)
클라라 푈츨 (1885년 1월 7일 결혼)
부모마리아 안나 시클그루버
생부 참고
친척히틀러 가문
자녀9명 (아들 알로이스 2세, 딸 앙겔라, 아들 아돌프, 딸 파울라 포함)

2. 생애

1837년, 알로이스 히틀러는 슈트로네스 마을에서 마리아 안나 쉬클그루버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842년 어머니가 제분공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하자 델러스하임 근교에 있는 요한 게오르크의 동생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의 집으로 입양되었다.

1851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알로이스는 에서 구두 장인의 도제 생활을 시작했고, 17세에 기능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1855년 오스트리아 제국 재무성의 경비원이 되었고, 1868년에는 정식 관리가 되어 승진을 거듭했다.

1873년 36세에 안나 글라슬회러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1876년 양아버지인 요한 네포무크에 의해 계부 요한 게오르크의 적자로 인지되어 '히틀러'로 성을 개명했다. 이후 병약한 아내를 돌보기 위해 집에 함께 살게 된 요한 네포무크의 손녀 클라라 페르츨을 만났다.

1880년 안나 글라슬회러와 사실상 이혼했지만, 가톨릭법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는 이혼할 수 없었다. 1882년에는 프란치스카 마체르스베르거와의 사이에서 아들 알로이스를 낳았다. 1883년 안나 글라슬회러가 사망하자 프란치스카와 정식으로 결혼했고, 같은 해 딸 안젤라가 태어났다. 그러나 프란치스카는 1884년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클라라가 히틀러 가의 살림을 맡았고, 알로이스와 관계를 맺어 임신했다.

1885년 교황의 허가를 받아 클라라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알로이스와 클라라 사이에는 6명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대부분 요절했고 1889년에 태어난 아돌프1896년에 태어난 파울라만이 성장했다.

1892년 린츠 세관의 상급 사무관이 되었고, 1895년 퇴직하여 연금 생활을 시작했다. 1903년 1월 3일 레스토랑에서 쓰러져 폐출혈로 사망했다. 상 오스트리아주 "일보"는 그의 추도 기사에서 관리, 농업, 양봉 분야에서 유능했던 점과 절약가였음을 언급했다.

2. 1. 유년 시절

1837년, 알로이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발트피르텔 슈트로네스 마을에서 마리아 쉬클그루버의 사생아로 태어났다.[54] 세례 증명서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고, "사생아"라고 적혀 있었다.[5][6][7] 그는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요하네스 쉬클그루버 밑에서 자랐다.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의 집


1842년, 어머니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하면서, 알로이스는 요한 게오르크의 동생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의 집으로 보내져 자랐다.[23] 요한 네포무크는 슈피탈 마을에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알로이스는 초등학교에 다녔고, 지역 구두 수선공에게서 구두 제작 수업을 받았다.

1851년경, 알로이스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으로 가서 약 5년간 구두 수선공의 도제 생활을 했다.

2. 2. 도제 생활

알로이스 히틀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슈피탈 지역의 구두 직공 조수로 일하다가 으로 가 약 5년간 구두 수선공 도제 생활을 하며 자격증을 취득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는 알로이스가 13세에 빈으로 가 도제 생활을 시작해 18세에 시험에 합격했다고 적혀있지만, 실제로는 17세였다. 이후 1855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재무성의 경비원이 되었고,[2] 정식 관리가 되어 승진을 거듭했다.[2]

2. 3. 관리 생활

알로이스는 1855년 재정부 국경 감시 세관원으로 임명되어 18세의 나이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잦은 재배치로 인해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11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55]

이후 그는 계속 승진하여 1860년에는 국경 감시 하사관직에 올라 오스트리아의 벨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864년에는 특별 훈련과 시험에 합격하여 재무부 수위 겸 보고자(피난츠바흐 오버아우프제어)를 시작으로 정식 관리직을 맡게 되었다.[34][35] 이후 린츠, 브라우나우암인을 다니면서 세관 근무 임시 사무관보, 동사무관, 검사관보를 거쳐 1875년에는 브라우나우암인의 세관 사무관이 되었다. 1892년에는 임시 상급 사무관, 1894년에는 '데피니티버 졸로베르암츠-오피셜'(확정된 선임 세관 검사관, 대위에 해당)로 승진했다. 알로이스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진급할 수는 없었다.[34][35]

2. 4. 히틀러로의 개명

알로이스는 1876년 여름, 39세에 자신의 성을 쉬클그루버에서 히틀러로 공식 변경했다. 개명 이유는 삼촌이자 생부로 추정되는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Johann Nepomuk Hiedlerde))의 법적인 아들이 되어 그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알로이스는 될러스하임 교구성당 신부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라고 주장했지만, 요한이 이미 20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요제프 로메더(Josef Romederde), 요한 브라이텐더(Johann Breitenderde), 엥겔바르트 파우크(Englebert Paukhde) 등 세 명의 증인 앞에서 신부는 알로이스를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의 합법적인 자식으로 인정하고, 세례명을 '히들러'로 바꾸었다.

1877년 1월 6일, 미스텔바흐((Mistelbachde)) 사무소에서 '알로이스 시클그루버'에서 '알로이스 히틀러'로 공식 개명되었다. '히들러' 대신 '히틀러'로 표기된 이유는 사무소 서기의 실수라는 설이 유력하다. '히틀러'라는 성은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표준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은 이 사실을 이용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원래 성이 '시클그루버'라며 "하일 시클그루버(시클그루버 만세)!"라는 흑색선전용 소책자를 독일 대도시에 배포하기도 했다.

2. 5. 결혼

알로이스 히틀러는 1873년 안나 글라슬회러(Anna Glassl-Hoererde)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알로이스는 36세였고 안나는 50세의 유복한 연초 감시관의 딸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결혼 직후 병을 얻어 원만하게 결혼생활을 하지 못했다.[60]

1875년 알로이스는 브라우나우암인의 한 여인숙에 하숙하게 되면서 19세의 고용인 프란치스카 마첼베르거(Franziska "Franni" Matzelbergerde)를 알게 되었다. 알로이스는 1870년대에 다수의 간통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880년 11월 7일 안나와 합의하에 별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 교회법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로이스와 프란치스카는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

1876년 알로이스는 자신의 6촌이자 이종사촌이었던 16세의 클라라 푈츨을 하녀로 고용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카는 클라라에게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요구했고, 알로이스는 클라라를 내보냈다.

1882년 1월 프란치스카는 알로이스의 사생아 알로이스 마첼베르거(Alois Matzelbergerde)를 낳았다. 이후 알로이스 마첼베르거는 알로이스 히틀러 유니오어로 개명된다. 1883년 4월 6일, 별거 중이던 안나가 사망하자, 알로이스는 5월 22일 브라우나우에서 21세의 프란치스카와 결혼식을 올렸다. 알로이스는 45세였다. 그는 아들 알로이스 히틀러 2세의 신분을 합법화했다.[39] 1883년 7월 28일에는 안젤라가 태어났다. 그러나 프란치스카는 폐 질환을 앓게 되었고, 란스호펜으로 이송되었다. 프란치스카를 간호하기 위해 알로이스는 클라라 푈츨을 다시 불렀다. 프란치스카 마첼베르거는 1884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1]

프란치스카의 사망 이후, 클라라 푈츨은 가정부로 알로이스의 집에 머물렀다.[41] 클라라는 알로이스의 아이를 임신했다. 알로이스는 클라라와 즉시 결혼하고 싶었지만, 알로이스와 클라라는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교회에 면제를 신청해야 했다.[42] 1885년 1월 7일,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푈츨은 폼머 여인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43] 결혼식 후 알로이스는 일터로 돌아가 남은 시간 동안 일을 했고, 클라라는 조촐한 의례에 불과했다고 여겼다. 또한 클라라는 알로이스를 계속 삼촌이라고 불렀다.[44]

3. 알로이스 히틀러의 생부 논란

알로이스 히틀러의 생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히틀러 역사가들은 다음 세 인물을 생부 후보로 거론한다.[23]


  •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 알로이스의 의붓아버지였으며, 훗날 알로이스는 요한을 생부라고 주장했다.
  •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의 동생이자 알로이스의 의붓삼촌. 알로이스를 청소년기에 부양하고 재산 일부를 증여했다.
  • 레오폴트 프랑켄베르거(Leopold Frankenbergerde): 한스 프랑크는 마리아 쉬클그루버가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프랑켄베르거 가문에서 가정 조리사로 일할 당시 레오폴트와의 관계로 알로이스를 출산했다고 주장했다.


1837년, 알로이스는 슈트로네스 마을에서 마리아 안나 쉬클그루버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842년 어머니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하면서, 알로이스는 델러스하임 근처에 있는 요한 게오르크의 동생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의 집에서 자랐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였던 한스 프랑크1930년에 히틀러로부터 가계 조사를 명령받았다. 프랑크의 조사에 따르면 마리아 안나가 그라츠의 프랑켄베르거라는 유대인 가정에서 하녀로 일했는데, 그때 가진 아이가 알로이스라고 했다. 그러나 전후 그라츠 대학의 니콜라우스 폰 프레라도비치 교수가 조사한 결과, 알로이스 탄생 전 기간에는 그라츠에 유대인이 살지 않았고, 그라츠의 프랑켄라이터 가문(프랑켄베르거 가문은 프랑크의 오류)은 몰락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3. 1.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

많은 역사학자들이 알로이스 히틀러의 의붓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를 생부로 추정한다. 알로이스는 훗날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를 자신의 생부라고 주장했다.[38]

1842년, 알로이스의 어머니 마리아 안나 쉬클그루버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했다. 그러나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는 알로이스를 법적인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망할 때까지 알로이스를 자신의 친족으로 등재하지 않았다.[38]

1876년 중반, 알로이스는 뢸러스하임의 교구 사제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라고 주장하며, 세 명의 친척(그 중 한 명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의 형제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사제는 출생 증명서를 수정했고, 알로이스는 "알로이스 히틀러"로 개명했다.[36]

3. 2.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의 동생이자 알로이스 히틀러의 의붓삼촌이다. 알로이스를 청소년 때 부양했으며 후에 상당 부분을 증여하기도 했다.[23] 베르너 마저는 알로이스의 아버지가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라고 주장했는데, 마저는 당시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으며, 결혼한 부인과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알로이스를 부양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으로 요한 게오르크와 마리아와의 결혼을 주선했다고 주장한다.

3. 3. 레오폴트 프랑켄베르거

한스 프랑크는 마리아 쉬클그루버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프랑켄베르거 가문의 가정 조리사로 일할 당시, 19살 정도의 아들이 있는 부유한 유대인인 레오폴트 프랑켄베르거와 관계를 맺고 알로이스를 낳았다고 주장했다.[54]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기록된 프랑크의 진술에 따르면, 프랑켄베르거가 알로이스가 14살이 될 때까지 마리아에게 양육비를 지급했으며, 마리아와 프랑켄베르거 사이의 편지들이 프랑켄베르거의 아들이 알로이스의 생부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54]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 주장은 역사가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부정되었다. 히틀러 역사가인 이언 커셔(Ian Kershaw영어)는 15세기에 그라츠 지역의 유대인들은 추방되어 알로이스가 태어나기 전까지 정착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마리아가 그라츠에 머문 그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54] 1942년 하인리히 히믈러의 주도하에 게슈타포의 조사까지 이루어졌지만 아무런 변경사항은 없었다고 밝혔다.[54]

마르크 페르메이런(Marc Vermeeren)이 2007년 발표한 저서에 의하면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의 Y 염색체가 히들러 가의 염색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증조부가 프랑켄베르거라는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54]

4. 알로이스와 클라라와의 관계

1876년, 알로이스는 양아버지 요한 네포무크에 의해 계부 요한 게오르크의 적자로 인지되어 성을 "히틀러"로 바꾸었다. 이때 요한 네포무크의 손녀 클라라 푈츨을 만나 병약한 아내를 돌보기 위해 집에 함께 살게 했다. 1880년 알로이스는 첫 번째 부인 안나 글라스와 사실상 이혼했지만, 가톨릭법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는 이혼할 수 없었다. 이후 알로이스는 프란치스카 마첼스베르거라는 19세 웨이트리스와 관계를 맺었고, 1882년에는 두 사람의 아들 알로이스가 태어났다. 1883년 안나 글라스가 사망하자 알로이스와 프란치스카는 정식으로 결혼했고, 같은 해에 딸 안젤라가 태어났다. 그러나 프란치스카는 몸이 약해져 요양을 떠났고, 이듬해 1884년 사망했다. 이 무렵부터 클라라는 프란치스카를 대신해 히틀러 가의 살림을 맡았지만, 알로이스와 관계를 맺어 임신했다.

당시 가톨릭법 규칙에 따르면, 요한 게오르크의 아들로 인지된 알로이스와, 그의 동생 요한 네포무크의 손녀인 클라라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42] 1884년에 허가가 났고, 1885년 1월 7일 폼머 여관의 최상층에 있는 히틀러의 임대 방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몇 명의 하객과 증인을 위해 식사가 제공되었다. 그 후 히틀러는 남은 하루 동안 일을 하러 갔다. 클라라도 결혼식을 짧은 예식으로 여겼다.[43] 결혼 생활 동안, 그리고 아마도 알로이스의 아버지가 클라라의 외할아버지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는 것과 일치하게, 알로이스와 클라라는 서로를 "삼촌"과 "조카"라고 계속 불렀다.[44]

알로이스는 가족에게 엄격하고 권위적인 가장으로 묘사되었다.[50] 그는 아내 클라라에게 폭언을 일삼았고,[4] 자녀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32][49] 특히 아들 아돌프 히틀러와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는데,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지만, 아돌프는 아버지의 강요에 반발했다.[48]

4. 1. 자녀

클라라 히틀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출생 및 사망 기록은 다음과 같다.

순서이름출생일사망일생존 기간
첫째(아들)Gustav Hitlerde1885년 5월 17일1887년 12월 8일2년
둘째(딸)Ida Hitlerde1886년 9월 25일1888년 1월 2일2년
셋째(아들)Otto Hitlerde1887년 5월 말1887년 11월 초6개월 미만
넷째(아들)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de)1889년 4월 20일1945년 4월 30일56년
다섯째(아들)Edmund Hitlerde1894년 3월 24일1900년 2월 29일6년
여섯째(딸)파울라 히틀러 (Paula Hitlerde)1896년 1월 21일1960년 6월 1일64년



클라라는 총 6명의 자녀(아들 넷, 딸 둘)를 낳았지만, 이 중 넷은 유아기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45] 이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가 맏이가 되었으며, 파울라 히틀러와 함께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히틀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유이하게 성인이 될때까지 생존하였다. 알로이스는 전 부인 프란치스카 마첼스베르거의 자식들인 알로이스 히틀러 2세와 앙겔라 히틀러와도 관계를 유지하며 재정적으로 지원했다.[46][47]

5. 아돌프와 알로이스와의 관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12살 때 알로이스가 강요한 공무원 대신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화가가 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다.[64] 아돌프는 아버지의 권위에 반항하며,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고자 했다.

알로이스는 아들이 자신처럼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지만, 아돌프는 아버지를 멀리하며 알로이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알로이스가 공무원의 삶을 칭찬할 때, 히틀러는 평생을 하찮은 일에 얽매여 살 것이라 생각하며 그의 생각을 비웃었다. 알로이스는 아돌프에게 복종을 강요했지만, 아돌프는 아버지의 뜻과 정반대로 행동하려 했다.[64]

알로이스는 아돌프에게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지만, 아돌프는 게으르고 낭만적인 성향을 가졌다.[64] 또한 알로이스는 가족에게 거만하고 폭력적이어서, 히틀러는 자주 폭행을 당했다. 히틀러는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멀리했고, 온화한 어머니를 더 좋아했다. 훗날 히틀러는 비서에게 아버지의 매질 속에서 울지 않고 매질 횟수를 세며 인내심을 시험했다고 말했다.[64]

베르너 마저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미술, 역사, 지리 등 좋아하는 과목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지만, 다른 과목에서는 낙제하거나 낮은 성적을 받았다. 마저는 이를 주입식 교육에 대한 히틀러의 반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린츠 실업학교 교사 빌헬름 휴머는 히틀러를 재능은 있지만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6. 죽음과 사후

1903년 1월 3일, 알로이스 히틀러는 레온딩크의 한 술집에서 평소처럼 아침 와인을 마시며 신문을 보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옆방으로 옮겨졌으나 몇 시간 후 사망했다.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히틀러 가문의 주치의였던 에드바르트 블로흐는 뇌일혈로 진단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뇌졸중으로 기록했다.[52] 당시 알로이스의 나이는 67세였고, 아돌프 히틀러는 13세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 ...15세 때 돌연 아버지를 잃었다. 평소 매우 건강했던 아버지에게 갑자기 뇌일혈이 일어났던 것이다. 가족 모두를 슬픔에 몰아넣은 채 그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지상의 생을 마쳤던 것이다. 아버지가 더할 나위 없이 바랐던 일, 자신의 고달팠던 인생에서 자식을 지키고 생계를 함께 마련하려 했던 일은 당시 그로서는 외견상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 속에서도 당시 아버지도 나도 몰랐던 장래에 대한 맹아를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 3월 28일, 레온딩 시립 묘지에 있던 알로이스 히틀러와 그의 아내 클라라의 묘비는 후손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 후손은 알로이스 히틀러의 첫 번째 아내 안나의 나이 많은 여성 친척으로 알려졌으며, 묘지 부지에 대한 권리도 포기했다. 묘지는 흰 자갈로 덮였고, 그 이후 나무도 제거되었다. 아돌프 히틀러 부모의 유해가 그곳에 여전히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7. 사상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알로이스가 "세계 시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유대주의적 언행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마저와 아우구스트 쿠비체크는 이 기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어쨌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8. 대중문화

헬무트 그림은 1980년 ''예기치 못한 이야기'' 에피소드 "창세기와 재앙"에서 알로이스 히틀러 역을 맡았다.[1]

제임스 레마는 2002년 ''환상특급'' 에피소드 "어둠의 요람"에서 알로이스 히틀러 역을 맡았다.[2]

이안 호그는 2003년 ''히틀러: 악의 부활''에서 알로이스 히틀러 역을 맡았다.[3]

참조

[1] 웹사이트 third line https://data.matricu[...]
[2] 서적 1999
[3] 서적 1999
[4] 서적 Hitler: Ascent 1889-1939 2016
[5] 서적 Adolf Hitler 1976
[6]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New York: Simon & Schuster 1960
[7] 서적 1999
[8] 서적 Hitler and the Rise of the Nazi Party Pearson Education 2003
[9] 서적 1999
[10] 서적 Hitler New York: Vintage 1975
[11] 서적 The Holocaust https://books.google[...] Greenwood 1998
[12] 웹사이트 Ancestry of Adolf Hitler http://www.wargs.com[...] 2013-01-25
[13] 웹사이트 Die Ahnentafel des Führers https://books.google[...] 2013-01-25
[14] 뉴스 Lineage of Adolf Hitler – Density inbreeding http://www.spiegel.d[...]
[15] 간행물 Hitler – Kein Ariernachweis http://www.spiegel.d[...]
[16] 서적 The Face of the Third Reich
[17] 서적 1998
[18] 서적 1998
[19] 서적 Hitler's Vienna: A Portrait of the Tyrant as a Young Man https://books.google[...] Tauris Parke
[20] 웹사이트 Hatte Hitler jüdische Vorfahren? http://www.h-ref.de/[...]
[21] 웹사이트 Was Hitler part Jewish? http://www.straightd[...] 1993-04-09
[22] 백과사전 Was Hitler Jewish? https://www.jewishvi[...]
[23] 뉴스 Hitler 1889–1936: Hubris: Chapter One https://www.nytimes.[...]
[24] 서적 2008
[25] 서적 1998
[26] 학술지 Aus den Gemeinden von Burgenland: Revisiting the question of Adolf Hitler's paternal grandfather Sage 2019-05-02
[27] 웹사이트 Altmetric listing of news articles https://sage.altmetr[...] Sage
[28] 웹사이트 Historians cast doubt on Hitler Jewish heritage claims https://www.timesofi[...] 2019-08-07
[29] 서적 1998
[30] 웹사이트 DNA Tests: Hitler Descended From Jews, Africans? https://www.cbsnews.[...] 2022-05-19
[31] 웹사이트 Family Tree DNA questions reporting about Hitler's origins http://www.familytre[...] 2015-07-03
[32] 서적 1972
[33] 서적 Hitler: A Life
[34] 서적 Hitlers Wien: Lehrjahre eines Diktators Piper 1997
[35] 서적 Die 101 wichtigsten Fragen: Hitler C.H. Beck 2019
[36] 서적 Adolf Hitler: His Family, Childhood and Youth. Hoover Institute
[37] 서적 Hitler: Legend, Myth and Reality Penguin Books Ltd
[38] 문서
[39] 웹사이트 "Hitler As He Knows Himself" https://web.archive.[...] Nizkor.org 2014-06-15
[40] 서적 Hitler: A Study in Tyranny Harper & Row
[41] 문서
[42] 뉴스 Explaining Hitler: Chapter One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43] 서적 The Life and Death of Adolf Hitler https://archive.org/[...] Praeger
[44] 서적 The Limits of Ferocity: Sexual Aggression and Modern Literary Rebellion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45] 문서
[46] 서적 Hitlers Nibelungen Samples Grafenau
[47] 서적 The Life and Death of Adolf Hitler
[48] 서적 Hitler's Vienna Tauris Parke Paperbacks
[49] 서적 Masters of Death: The SS-Einsatzgruppen and the Invention of the Holocaust https://books.google[...]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50] 문서
[51] 문서 Rauscher means cider at the beginning of fermentation, and Gut means farm in this context.
[52] 문서 Adolf Hitler Mein Kampf
[53] 뉴스 Adolf Hitler parents' tombstone in Austria removed https://www.bbc.co.u[...] 2012-03-30
[54] 문서 때때로 시켈크루버({{llang|de|Schickelgruber}})라 표기하는데 오류이다.
[55] 문서 당시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마르크({{llang|de|Ostmark}})로 표기되는 경향이 있었다.
[56] 문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57] 문서 알로이스
[58] 문서 [[아돌프 히틀러]]
[59] 문서 원래 [[발트피르텔]] 마을의 방언으로 “우물 파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60] 문서 혹은 아마도 테클라({{llang|de|Thekla}})라고도 한다.
[61] 문서 혹은 아마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개 중 무엇이 확실히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또한 푈츨이 임신했던 그 아이(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아이는 구스타프이다.)가 정확히 누구의 자식인지는 확실히는 모르나, '히틀러'라는 성이 붙은 바로는 그 아이는 알로이스의 자식임에 틀림없으며, 적어도 알로이스 히틀러가 그의 자식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62] 문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법]]으로는 엄연히 근친상간/근친결혼을 금하고 있다.
[63] 문서 이 지역은 대략적으로 린츠에서 남서로 30마일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64] 문서 히틀러가 말한 다른 말로는, 그는 람바흐의 베네딕트파 계열의 수도원 학교에 다닌 영향으로 처음에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11살때부터 예술가를 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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